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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당신께 인사를 건네는 대신, 당신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Haemin Ryu — last month

이 글은 소설가 조갑상에게 보내는 서신입니다. 동시에 이 서신은 실제로 보내지지 않은, 발송의 목적이 해제된 글입니다.

Haemin Ryu — last month

조갑상 선생님께.

작년 11월 남천동에서 뵈었던 것이 선생님과 제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했던 순간입니다. 해결되지 않은 세계의 상태는 지나버린 해와 다가오는 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새로운 해는 찾아왔습니다.

Haemin Ryu — last month
Haemin Ryu — last month

올해 2월 즈음 간단히 휴대전화 메시지로 소식을 전한 것이 전부인데, 시간은 참으로 빠르게 흐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5월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소설 『밤의 눈』을 영화로 가져올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지난 만남에서 소설의 저자인 선생님을 처음 만났던 저의 경외가 경솔한 태도로 닿지 않았기를 이 서신을 통해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바람은 저에게 어떤 시간과 경험을 꺼내게 만듭니다. 그것은 제가 『밤의 눈』이라는 소설에 이르게 된 경위입니다. 그 경위를 이 서신을 통해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2019년 〈해협〉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작업을 마치고 난 직후 인접한 아시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혁명과 항쟁에 관한 작업을 하기 위해 홍콩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 조금 더 상세히 전하기 위해, 〈해협〉의 사운드 후반작업 차 2019년 9월 대만 남부의 타이난을 방문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타이난의 녹음실에서 이 작업을 함께 했던 대만 국적의 친구에게 홍콩은 곧 우리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미래’라는 단어 앞에서 속수무책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녹음실의 정지된 공기를 빠져나와 남국 특유의 습하고 더운 공기를 통과하면서 시간을 헤쳐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시간이 어딘가로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호텔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예약했던 호텔은 창문이 없는 호텔이었습니다. 세상의 기운이 모두 통제된 객실에서 창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벽걸이 TV였습니다. TV는 생김새도 창문과 흡사했는데, 리모컨으로 전원을 켜면 세상으로 향해 있는 문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창문이 없어 깜깜한 호텔 방에서 TV를 켜고 뉴스 보도를 통해 흘러나오는 홍콩의 항쟁을 지켜봤습니다. 홍콩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그때 먹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조금 더 과거로 이동합니다. 2019년 7월 초량, 남선창고 터입니다. 선생님의 소설 「누군들 잊히지 못하는 곳이 없으랴」에는 남선창고의 육신과 같은 문장이 담겨 있습니다. 잔해와 같은 담장은 더 이상 남선창고의 일부가 아닙니다. 마트 주차장으로 변해버린 남선창고 터에서 작은 제의와 같은 퍼포먼스가 열렸습니다. 저는 멀찍이서 선생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얼굴을 몰랐지만 당시엔 그 얼굴이 선생님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드리는 대신 집으로 돌아와 선생님의 소설 『밤의 눈』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9월의 타이난으로 이동합니다. 창문이 없는 호텔방을 떠나 부산으로 돌아온 저는 〈해협〉의 후반작업을 마무리했습니다. 영화는 완성되었고 상영되었습니다.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은 부산으로 돌아오기 전 머물렀던 창문이 없는 호텔 방과 비슷했습니다. 깜깜한 방엔 창문 대신에 TV가 깜깜한 극장엔 TV 대신에 스크린이 걸려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바깥을 향한 창문이 열립니다. 홍콩에 가기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느슨한 시간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떠올려보면, 시간과 시간 사이가 최대한의 간격으로 늘어져 있어서 느슨했던 시기라고 느껴집니다. 그 무렵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대림동을 카메라에 담기 위한 작업을 준비했습니다. 카메라로 대림동을 촬영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카메라의 바깥이 궁금했습니다. 카메라로 찍혀지는 이미지의 바깥이 궁금했습니다. 찍으면서 동시에 찍을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해협〉을 위해 촬영했던 데이터들을 꺼내 봤습니다.

Haemin Ryu — last month
Haemin Ryu — last month

짧지 않은 시간에 걸쳐 촬영된 이미지들 중에서 어떤 것은 영화가 되었고 어떤 것은 영화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생각들을 애써 매듭짓지 않고 대림동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대림동을 카메라에 담았다기보다는 대림동에서 촬영을 하면서 대림동 바깥에 있는 것들, 대림동에서 멀리 떨어진 것들을 떠올렸습니다.

Haemin Ryu — last month
Haemin Ryu — last month

2020년이 시작되고 세계는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홍콩에 가는 일은 불가능한 여정으로 남았습니다. 가능하지 않은, 가능하지 않았던 것들을 떠올렸습니다. 찍어야 했지만 찍을 수 없게 된 것들, 찍었지만 찍혀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2019년 7월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는 대신 읽었던 소설을 향합니다. ‘바깥’은 ‘이곳의 바깥이 되는 저곳’ 정도의 표현으로 모두 설명되지 않는 ‘일정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홍콩의 바깥은 이곳이기도 하고, 혁명과 항쟁의 바깥은 생명과 평화, 위태로움과 절망이기도 합니다. 불가능한 여정 앞에 불가능의 영화가 있습니다. 미래의 바깥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더 머나먼 미래가 있습니다. 바깥을 찍어보기로 했습니다. 여정, 혁명, 항쟁, 소설, 그리고 오늘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소설을 영화로 옮기기 위한 방법의 바깥으로 이동합니다. 그 방법의 바깥으로 내딛기 위해, 선생님께 드리려 했던 인사 대신 읽었던 소설을 이제 덮습니다. 이것이 당시와 지금으로부터 『밤의 눈』이라는 소설에 이르게 된 저의 경위입니다. 오늘이 지나면 선생님을 곧 다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21년 4월 20일
오민욱 드림

Haemin Ryu — last month

오민욱은 영화감독, 시각예술가이다. 6월 항쟁,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 백악기에 형성된 암석군, 부산의 기지촌, 거창양민학살사건, 동아시아의 두 해협에 관한 작품을 만들었다.

Oh Minwook is a film director and visual artist. His work about the June Democratic Struggle, the Busan American Council Arson, the millitary camp town in Busan, the Geochang Massacre of the Korean War and two straits of East Asia were the results of the artistic practice.

Haemin Ryu — 2021.5.17 09:08 AM

표백된 무대 Bleached Stage

Haemin Ryu — 2021.5.21 03:58 AM
Haemin Ryu — 2021.5.16 11:23 AM

〈표백된 무대〉는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한 이주여성 운동단체 조각보의 대표이자 중국 동포인 박연희를 인터뷰 한 영상작업이다. 박연희는 연변의 방송국에서 PD로 근무하던 시절 ‘개량한복’을 지급받았다. 그가 조선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치파오’를 입고 행사에 참여한다. 그가 중국 출신이기 때문이다.
인터뷰는 중국에 가는 한국인에게 전해 줄 이야기와 한국에 올 중국인에게 전해 줄 이야기가 교차하며, 중국과 한국 두 문화의 사이에서 중국 동포로서 점할 수 있는 발화의 위치를 가시화한다. 그의 이야기는 한국에서 겪은 개인 간의 사소한 갈등에서 시작해 제도적 갈등을 폭로하게 되는데, 이는 한국인이 ‘다문화주의’에서 기대했던 이주민의 이미지에 균열을 가한다.
한국 내 이주민 정책에서만큼은 관용과 포용이 자유주의의 통치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주민의 고유성과 맥락을 지운 채 ‘다문화주의’라는 이미지에 가둬두고 그 자리를 벗어나면 관용을 철회한 후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배경 없는 무대에서, 무엇이든 합성할 수 있는 크로마 키(chroma key)벽 앞에서 박연희는 ‘한민족’이자 중국인인 다중적 역할을 수행하며 조언과 폭로를 반복한다.

Bleached Stage
표백된 무대
2019
two channel video, color, sound
25min 52sec

출연 : 박연희
촬영 : 김재현
도움 : 허세준

Haemin Ryu — 2021.5.14 02:02 AM

반재하는 시각예술가로서 유통 그 자체보다 유통 이전과 이후에 벌어지는 양상에 관심을 두고 있다. 개인적 체험, 사소한 사건, 일상적 사물 등에서 국경의 존재방식, 냉전의 현재성, 산업의 재편 등 개인을 초과하는 시스템을 탐구한다. 최근에는 '남한인은 남한의 바깥을 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북한으로 탈출하는 게임을 만들고 있다.

Haemin Ryu — 2021.5.17 09:02 AM
Haemin Ryu — 2021.5.14 02:04 AM

생성대화 : (불)투명한 막 걷어내기

Haemin Ryu — 2021.5.14 09:14 AM

대림동과 중국 동포를 다룬 영상 작업 〈투명한 막〉과 〈불투명한 막〉을 만든 조기현은 이주인권 연구자이자 활동가 양혜우와 함께 이주민의 몫과 혐오의 맥락을 주제로 대담한다. 양혜우는 대림동과 중국 동포를 향한 혐오의 작동 방식을 짚으며 동시에 이주민의 한국 사회운동 경험에 집중해왔다. 차별의 대상이자 해방의 주체인 이주민을 중심으로 우리가 어떤 미래를 만들어가야 하는지 논의해본다. 이는 조기현이 지난 영상 작업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대림동 풍경과 대림동을 향한 시선 사이에 놓인 ‘(불)투명한 막’을 걷어내기 위한 대화다.

Haemin Ryu — 2021.5.14 09:15 AM

투명한 막 - 어안 렌즈, 일출, 부재 Transparent screen - Fisheye Lens, Sunrise, Absence

Haemin Ryu — 2021.5.22 08:34 AM
Haemin Ryu — 2021.5.16 11:29 AM

불투명한 막 - 클로즈업, 간병, 신체 Opaque Screen - Close up, care, Body

Haemin Ryu — 2021.5.22 09:04 AM
Haemin Ryu — 2021.5.19 01:48 AM

〈투명한 막 - 어안 렌즈, 일출, 부재 Transparent screen - Fisheye Lens, Sunrise, Absence〉
Single channel video, 42’47’’, 2019
촬영: 김재현
도움: 김태윤

〈불투명한 막 - 클로즈업, 간병, 신체 Opaque Screen - Close up, care, Body〉
Single channel video, 7’25’’, 2019
출연: 조혜리, 국순복
촬영: 최혜자

Haemin Ryu — 2021.5.22 09:06 AM

조기현은 영상작업과 글쓰기를 병행한다. 영상 〈건설의 벽〉과 〈1포 10kg 100개의 생애〉를 연출했다. 그 외에 돌봄에 관한 책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썼고, 칼럼 '조기현의 몫'을 연재 중이다.

Haemin Ryu — 2021.5.22 08:24 AM

포도마마는 버드나무 아래서 봄을 기다린다 Fodomama waits spring under the willow tree

Haemin Ryu — 2021.5.22 08:31 AM
Haemin Ryu — 2021.5.22 08:28 AM

만주족 신화에 나오는 버드나무 여신 포도마마(Fodomama)를 전지(剪紙) 공예로 형상화하여 버드나무 가지에 매달았다. 전지공예는 동북아시아 북방민족의 오래된 전통으로서 마을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부족민들이 둘러앉아 나무껍질이나 종이를 오리며 화합을 다졌다고 한다.
이 종이인형 위에 만주국 국기와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South China Morning Post, 南華早報)의 오로첸족에 대한 다큐멘터리, 북한 가요 ‘푸른 버드나무’를 프로젝션했다. 일본제국은 만주국을 건설하며 오로첸족을 '동양의 아리아인'으로 신성화했고,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중국을 침략한 영국의 홍콩 총독부 기관지였다. 아시아 근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두 세력을 종이인형에 투사해 아시아 민중의 '주체의 공백(the Void of Subject)’을 상징해보았다.

Fodomama waits spring under the willow tree
포도마마는 버드나무 아래서 봄을 기다린다
2019
디지털 허수아비, 버드나무, 소나무, 영상설치
8min 46sec

Haemin Ryu — 2021.5.23 07:08 AM

강영민은 대중소비문화를 구성하는 이데올로기 비판 작업을 해온 현대미술가다. 1999년 대안공간 루프 초대 큐레이터를 지낸 후, 팝아트조합을 결성해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는 다크 투어인 팝아트투어를 진행하고 아티스트 콜렉티브인 경성콤스터디를 결성했다.

Haemin Ryu — 2021.5.17 09:01 AM

디아스포라: 낯설던 단어

Haemin Ryu — 2021.5.17 09:45 AM

디아스포라. 영어 발음으로는 다이애스포러.
무슨 뜻일까. 사전을 뒤져 보면 금세 뜻이 나온다. ‘바빌론 유수 이후 유태인의 분산’이란다. 몇 개를 더 찾아보면 ‘이스라엘 외부로 유태인들의 분산’, ‘이스라엘 밖에 사는 유태인’이라는 뜻도 나온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고향, 기독교 용어로 본향에서 그 밖으로 유태인들이 흩어져 버린 현상, 혹은 그렇게 흩어져서 사는 사람들 모두를 지칭한다.
유태교와 기독교에 무지한 나로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불가능하고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기원전 6세기에 중동의 한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니 그걸 잘 알고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러니, 디아스포라라는 말에 슬프고 아프고 불행한 경험과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는 정도만 공감하고 넘어가자. 즉, 디아스포라는 강제적이고, 비자발적인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하나 더 있는데 아프리카인 디아스포라다. 주로 16세기부터 18세기 사이의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신대륙’으로 분산된 아프리카인을 말한다.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려는 사람은 없을 테니, 이것 역시 가슴 아픈 역사의 한 장(章)이다.
아프리카인 디아스포라는 근대 초기의 일이라 유태인 디아스포라보다는 가깝지만 그래도 500년 전의 이야기다. 게다가 대서양은 중동보다 한국에서 더 멀어서 경도(經度)로 따지면 지구 반대편이다. 유태인이 육로로 걸어서 분산되었다면, 아프리카인은 해로로 배를 타고 분산되었다는 상상 정도만 추가해 두자.
그런데 16년 전 ‘코리안 디아스포라’라는 책이 나왔다.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윤인진이라는 사람이 쓴 책이다. 드디어 코리안도 디아스포라의 한 사례가 된 것일까. 그동안 ‘재외동포’ 혹은 ‘재외한인’이라고 편리하게 쓰던 단어가 이렇게 바뀐 동기나 의도는 무엇일까.

Haemin Ryu — 2021.5.17 09:46 AM

흩어지는 삶, 흩어지는 단어

Haemin Ryu — 2021.5.17 09:46 AM

코리안은 무엇 때문에 분산되었을까. 유태인처럼 기원전 6세기부터나 아프리카인처럼 기원후 15세기는 아닌 것 같다. 당나라에 끌려간 고구려인이고, 원나라(몽고)에 끌려간 고려인이나, 왜나라(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청나라(만주)에 끌려간 조선인 등을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으로 잘 설명한 이론은 아직 없거나 내가 과문하다.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발생은 19세기 말부터다. 500년 가량을 버텨온 조선왕조가 호시탐탐 동아시아를 노리던 ‘서양 열강’ 앞에서 풍전등화에 놓이기 시작한 때다. 먹고 살기 힘든 민중들이 조선반도를 떠나 여기저기로 흩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과정이 고통스럽고 슬픔에 가득찬 과정이었다는 것도 상식이다. 간명하고 편의적 단어를 쓰면, 제국주의, 전쟁, 혁명 등의 거대한 사건들이 이들의 삶을 지배하고 규정했다.
즉, 유태인의 바빌론 유수나 아프리카인의 노예무역처럼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아니라 코리안의 디아스포라는 여러 사건들이 겹치고 포개지고 꼬이는 시간 속에 일어난 일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을 하나하나 알고, 러시아혁명, 신해혁명, 독립운동, 공산주의 운동 등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이 흩어지는 과정을 파악하기 힘들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반도를 떠난 사람들은 흩어진 장소에 따라 다른 이름을 갖게 되었다. 중국에 간 사람들은 조선족,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간 사람들은 고려사람(고려인), 아메리카나 유럽으로 간 사람들은 한인이 되었다. 일본에 간 사람들 일부는 재일조선인, 다른 일부는 재일한국인이 되었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 윤인진의 책을 보면 3장은 ‘중국의 조선족’, 4장은 ‘독립국가연합의 고려사람’, 5장은 ‘재일한인’, 6장은 ‘재미한인’이다. 하나 코멘트 하면 5장의 제목은 문제적이다.
이름부터 ‘통일’되지 않은 이런 복잡함에 대해 설명하려면 적어도 논문 서너개가 필요하다. 고려, 조선, 한(국)이라는 세 개의 단어들을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사용한다면, 그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복잡한 역사성을 읽어낼 수 없다.
논문 서너개를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냉전과 분단’이라는 만병통치약이 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된 현실이 70년 이상 지난 지금 시점에서 ‘대한’과 ‘조선’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역사를 넘는 상식이다. ‘대한’(줄여서 ‘한’)은 ‘남한’을 의미하게 되었고, ‘조선’은 ‘북조선’을 의미하게 되었다. 남한이나 북조선이라는 말을 남조선과 북한으로 각각 사용하기도 한다. 유감이 있을 때 그런다.
체제가 통합되지 않은 상태에서 용어가 통합될 수 없는 일이고, 용어는 통합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핵 분열하듯 갈래를 치게 된다.

Haemin Ryu — 2021.5.17 09:46 AM

역사의 새겨짐

Haemin Ryu — 2021.5.17 09:47 AM

당사자의 시각을 벗어나면 더욱 복잡해진다. 한 예로 위키피디아 등에 가서 영어로 ‘Korean’, 러시아어로 ‘Корейцы’, 중국어로 ‘조선족(朝鮮族)’을 찾아 보면, 세종대왕의 모습 뿐만 아니라 김일성의 모습과 박정희의 모습도 나온다. 아, 미국에서 코리안, 러시아에서 카레이치, 중국에서 조선족이라고 각각 부르는 것은 남한에서 ‘한민족’이라고 부르는, 북조선에서 ‘조선민족’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내가 알고 지내던 한 고려사람은 “거기(중앙아시아)에 살았을 때 고려사람이란 전 세계에 사는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줄 알았는데, 한국에 오니까 ‘우리만 고려사람’이라고 부르네요.”라고 서운한 어투로 말했다. 중국에서 온 조선족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한국인들의 반응을 많이 겪었다는 뜻이다.
한국인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한국인들, 즉, 대한민국 국적자들은 오랫동안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을 동일하게 여기고 살아 왔다. 한국인이면 한민족이고, 한민족이면 한국인이었다. 그래서 한국어를 못하는 ‘동포’가 한국에 오면 ‘당신은 왜 한국말을 못 하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형질인류학과 문화인류학의 구분은 대학교 안에서나 이루어졌다. ‘우리’는 그동안 그렇게 살아왔다는 뜻이다.
재밌는 일화가 있다. 북한을 입국하는 캐나다 한인에게 출입국사무소에서 일하는 북한 사람이 묻는다: “조선족인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북한에서는 북한 국적자는 ‘조선 사람’이고, 재외동포는 모두 ‘조선족’이다. 즉, 조선족은 중국 조선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 조선족, 러시아 조선족, 일본 조선족도 모두 있다. 만약 몇 년 뒤 한국인이 북한에 입국하면 ‘한국 조선족인가?’라는 말을 들을지 모른다. 그러면 ‘중국에서 온 게 아니라 한국에서 왔는데 무슨 말이냐?’라고 항의하면서 싸울지도 모르겠다.
냉전과 분단은 정말 많은 것을 꼬아놓았다. 뒤엉킨 실타래처럼. 이걸 풀어놓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러니 당분간은 꼬이고 엮이는 데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가 왜 그렇게 복잡한지도 이제사 이해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일본은 재일동포가 ‘귀화’하지 않으면 일본 국적으로 부여하지 않는다. 중국 조선족과 러시아 등 독립국가연합과도 다른 현실이다. ‘너무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 한국에 사는 화교도 이와 똑같다. ‘영주권’만 있을 뿐 ‘시민권’은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 두 가지 정체성이 경합한다. ‘조선’과 ‘한국’은 ‘사실상 두 개의 국가’인데 ‘대립적 이데올로기’는 그 가운데 하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남(南)을 지지하는 사람은 재일한국인이라는 이름에 만족하지만, 북(北)을 지지하는 사람은 재일조선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원한다. 그런데 전자는 한국이라는 국적을 갖지만, 후자는 어떤 국적도 가질 수 없다. 일본과 조선(북한) 사이에 국교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조선적 재일(자이니치)’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때 조선은 반도가 분단되기 이전의 조선이다. 그때 이주했으니까 틀린 말도 아니다. 이들은 한국에 자유롭게 여행할 수 없다. 정권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그래서 ‘조선족’과 ‘조선적’이 발음이 비슷하다고 헷갈리는 사람이 있는 것은 그 부수효과다.
여기까지 읽고 머리가 어지럽다고 호소하는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한국 그리고 조선의 현대사가 어지러웠으니 다른 방법이 없다. 게다가 더 어지러워졌다. 대략 1990년대 이후다.

Haemin Ryu — 2021.5.17 09:48 AM

돌아온 동포, 재(在)의 소멸

Haemin Ryu — 2021.5.17 09:48 AM

재미동포, 재일동포, 재영동포 등의 말은 익숙하고 합당하다. 1948년 대한민국이 성립한 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다음 외국으로 이주했으니 그다지 혼동스럽지 않다. 한국 국적을 유지하면 ‘재외국민’이고, 외국 국적을 취득하면 ‘재외교포’로 구분하는 것도 합리적으로 들린다. 예상할 수 있듯, 전자는 투표권이 있고 후자는 투표권이 없다. 그러다가 최근 바뀌고 있다.
그런데 조선족을 재중동포, 러시아 동포를 재러동포라고 부르는 것은 뭔가 어색하다. 그들은 대한민국 국적을 가져본 일이 없었고 40년 동안 왕래도 없었다. 왕래가 있었다면 속된 말로 ‘간첩’이었을 것이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저들이 ‘핏줄은 나누었을지 모르지만 저 멀리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사태가 바뀌었다. 이른바 냉전이 끝나면서 ‘쏘련’이 붕괴하고 ‘쭝국’은 개방을 가속화했다. 그쪽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이 ‘공산주의 국가들’에 살던 동포들이 여기저기 흩어지고 그 행선지 가운데 하나가 한국이었다. 4반세기쯤 지난 현재 조선족 동포는 약 50만명, 고려사람 동포는 약 4만명이 한국 내에 체류하고 있다. 세계 어디나 이민자들이 그렇듯 ‘비공식’으로 체류하는 사람들은 더 많을 것이다.
중국 조선족의 인구는 약 200만명으로 추산되고, 러시아 및 독립국가 연합 고려사람의 인구는 약 50만명으로 추산된다. 그렇다면 조선족의 경우 4분의 1이, 고려인의 경우 12분의 1 정도가 한국에 ‘돌아온’ 셈이다. 고려인의 경우 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하기 전 살던 연해주로 돌아온 사람들을 합하면 훨씬 많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재(在)’를 따지기가 힘들어졌다. 이른바 지구화(globalization) 이후의 시대에는 사람들의 이동이 대량으로 증가했다는 점이다. 여행이나 출장 같은 단기 방문도 있지만, 유학이나 취업 같은 중장기 이동도 있다. 즉, 늘상 들락날락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라면서 눈물을 흘리고 가는 이민과 ‘잠시 일 보고 돌아온다’는 출입국의 구분이 사라져 버렸다.
한 예로 조선족의 경우 한국인들이 ‘재중동포’라고 부를 때 당사자들은 ‘재한동포’라고 불렀다. 자신들이 ‘있는(在)’ 곳은 이제 중국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무슨 권리로? 여러 가지 말들이 오갔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고향에 돌아와 살 권리’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고향은 아니지만 선조의 고향이고, 그 고향에 돌아오고 싶었지만 ‘냉전과 분단으로 인해’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제라도 돌아와서 살겠다는 주장이다. 쉽게 반박할 수 없는 주장이다.
학계 일부에서는 이들 돌아온 동포의 성원권으로 시민권(citizenship)은 아니지만 민족권(ethnizenship)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민등록증을 바로 안기지는 못하지만, 특별한 비자를 주는 것으로 저 이론적 주장이 현실에 구현된 것이다. 재외동포 비자(F4)나 방문취업 비자(H2) 등이 그것이다. 이건 법률전문가가 이야기해 줘야지 나 같은 법률 아마추어가 할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도 문제가 남는다. 비자를 영원히 부여할 건지 한두번 부여하고 끝내야 할지, 3세까지는 주는데 4세도 줘야 할지, ‘이민족’과 결혼해서 낳은 애들(이른바 ‘혼혈’)도 국적을 줘야 할지……. ‘재외동포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조금 간단히 ‘까놓고’ 말하자. 아메리카, 유럽, 일본 등의 ‘선진국’에서 방문한 재외동포들은 동경하지만, 러시아, 중앙아시아. 중국 등의 ‘후진국’에서 방문한 재외동포들은 하대한다. ‘그러면 안 된다’고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몸으로는 그렇게 한다. 이런다면 동포에서 ‘동(同)’, 즉 ‘같다’는 글자의 의미란 무엇일까.
그러니 ‘코리안 디아스포라’리고 뭉뚱그리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실제는 위계와 차별을 끊임없이 만들면서……. 한마디로 에릭 남은 계속 잘나가지만, 백청강은 반짝 하고 말았다. 디아스포라는 굳이 쓸 필요 없는 말이 되어버렸다. 그런 디아스포라는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Haemin Ryu — 2021.5.17 09:49 AM

나가며

Haemin Ryu — 2021.5.17 09:49 AM

알리나는 우크라이나 동포다. 그녀의 어머니는 고려사람인데, 아버지는 독일사람이다. 이 ‘독일사람’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도 한 페이지는 필요하니 생략한다. 그녀는 그곳에서 대학교를 마치고 어떤 프로그램에 응모한 뒤 한국의 ‘명문대’에서 석사학위를 땄다. 우연히 만난 ‘재미한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 뒤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갔다. 재소(在蘇)에서 재우(在乌)와 재한(在韓)을 거친 뒤 재미(在美)가 되었다. ‘소’란 소련, ‘우’란 우크라이나를 말하는데. 내 의도는 이런 표현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비슷한 시기 나는 러시아 연해주의 우수리스크라는 도시를 방문했다. 그곳의 한 시장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 ‘동포’ 여성 두 명을 만났다. 말을 주고받다 보니 한 사람은 중국 조선족, 다른 한 사람은 우즈베키스탄 고려사람이었다. 두 여인이 중년을 지낸 나이에 만나서 서로 도우면서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조선족 여성에게 “한국말 잘 하시네요?”라고 말하니 “한국말 몰라요. 조선말은 할 줄 알지.”라고 답했다. 뒷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코리안’이라는 영어 단어를 쓰자. 두 경우만 이야기했지만, ‘이동하는 코리안’은 저렇게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우연히 서로 조우하기도 한다. 코리안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뭘까. 고려인이 제일 가깝다. 우리 모두는 고려인이다. 디아스포라든 아니든.

Haemin Ryu — 2021.5.17 09:50 AM

신현준은 성공회대학교 사회융합자율학부에서 가르치고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연구한다. 사회과학과 문화연구의 분야, 특히 대중문화, 월경의 이주, 도시 공간을 폭넓게 연구하고 있고, 동아시아에서 청년 하위문화(subculture)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수행하고 대안적 실천과 연대하고 있다.

Haemin Ryu — 2021.5.17 09:03 AM

No Such Diaspora / Hyunjoon Shin

Haemin Ryu — 4 days ago

Diaspora: a word, formerly unfamiliar

Diaspora. In English pronunciation; daɪˈæspərə. What does it mean? You can easily find its meaning in the dictionary: "Dispersion of the Jews after the Babylonian Exile.” If you look further down, you may find other meanings such as "dispersion of Jews outside of Israel" or "Jews living outside of Israel.” Hence, the word generally refers to a phenomenon in which Jews are scattered outside the homeland of Israel - “forever home” in Christian term - or all those who live dispersed in such a way.

As I lack comprehensive knowledge of Judaism and Christianity, further explanation is unreasonable, and I would not dare to go deeper. It is rather strange to know extensively about this in detail, considering that the event happened in a single region in the Middle East during the 6th century BC. So, let us just empathize with the fact that there are certain experiences and emotions of sadness, pain, and sorrow dwelling inside this word diaspora. Perhaps the most significant takeaway is that diaspora is something forceful and involuntary.

Here is an additional example: the African diaspora. This mainly refers to Africans dispersed into the "New World" by the trans-Atlantic slave trade between the 16th and 18th centuries. No one would voluntarily become a slave, making this another painful chapter of history.

The African diaspora took place in the early modern era, making this a perhaps closer-to-home matter than the Jewish diaspora, but it is still an incident from over 500 years ago. Even geologically speaking, the Atlantic Ocean is farther away from the Korean peninsula than the Middle East, and it is located on the opposite side of the globe along the longitude. Therefore, let us just add to the imagination that the Jews were dispersed by walking through the land, whereas the Africans were dispersed by the floating boats through the sea.

Sixteen years ago, a new kind of diaspora came to light. It was when The Korean Diaspora was published. Written by Yoon In-Jin, a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Sociology at the Korea University, it detailed a history of Koreans being dispersed. Has the Korean people finally come to be a case of diaspora? What motivated or intended this change of word for this term that was previously known as "overseas Koreans" or "Korean nationals abroad?”

Haemin Ryu — 4 days ago

Scattered Life, Scattered Words

What made Koreans disperse? The cause occurred neither in 6th century BC like in the case for the Jews nor the 15th century BC like for the Africans. I have not yet heard of a theory that holistically explains all these Koreans: the Koreans (from the Goryeo Dynasty) taken by the Tang Dynasty (current China), the Koreans (from the Goryeo Dynasty) taken by the Won Dynasty (current Mongolia), the Koreans (from the Joseon Dynasty) taken by the Wa (current Japan), and the Koreans (from the Joseon Dynasty) taken by the Qing Dynasty (past Manchuria) within the frame of diaspora. What is certain, however, is that the Korean diaspora has been an issue since the end of the 19th century.

It was when the Joseon Dynasty, which had been around for about 500 years, became exposed like a candle light in a storm to the "Western powers" seeking opportunity to prey on the countries of East Asia. It is clear that the people who suffered to sustain their lives have left the Korean peninsula and ever since been scattered everywhere. It is also without a question that the process of this scattering would have been one full of sadness and pain. It was one in which imperialism, war, and revolution dominated their whole lives.

In other words, Korean diaspora did not happen as a recognisable event as the Babylonian exile for the Jews or the slave trade for the Africans, but occurred within a timeframe where multiple independent causes overlapped and twisted onto themselves. Without knowing all the backgrounds of the First Sino Japanese War, Russo-Japanese War, Mukden Incident, Second Sino-Japanese War, Pacific War, and etc. as well as the Russian Revolution, the New Sea Revolution,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 Communist movement, and etc., it is very difficult to keep track of this whole process of scattering.

However, as time passed, depending on where they were scattered, people who left the Korean peninsula began to have different names. Those who went to China became Joseonjok (Korean-Chinese); those who went to Russia and Central Asia became Koryo-Saram (Koryo-People); and those who went to America or Europe became Han-in (Korean). Some of those who went to Japan became Zainichi Josenjin (在日朝鮮人), and others became Zainichi Kankokujin (在日韓国人). In fact, in The Korean Diaspora, Chapter 3 is “Joseonjok in China”; Chapter 4 is “Koryo-Saram of the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Chapter 5 is “Zainichi Koreans”; and Chapter 6 is “Koreans in the United States.” Lamentably, the title of Chapter 5 is problematic.

At least three or four research papers are needed to explain the complexity behind all these names: Goryeo/Koryo, Joseon, and Korea (Hanguk). These are not “unified.” If these three words are used “case-by-case,” it is impossible to read the complex historicality contained in each word.

What to do for those who can't read three or four research papers? There is a panacea called “Cold War and Division,” It is common sense that Daehan and Joseon have completely different meanings at this point in time, because more than 7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division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aehan (or Han for short) came to mean Nam-Han (South Korea), and Joseon came to mean Buk-Joseon (North Korea). The words Nam-Han (South Korea) and Buk-Joseon (North Korea) are sometimes used as Nam-Joseon and Buk-Han respectively. This latter pair usually serves to emphasize kinship between the two Koreas. Terms cannot be integrated in a system that is not integrated, and terms not only disintegrate but diverge like nuclear fission.

Haemin Ryu — 4 days ago

Engraving of History

It gets more complicated when you leave the first-person narrative. For example, if you go to Wikipedia and search for “Korean” in English, “Корейцы” in Russian, and “朝鮮族” in Chinese, you will not only find King Sejong the Great but also Kim Il-sung and Park Jeong-hee. Ah, calling them Korean in the US, Kareichi in Russia, and Chaoxianzu in China is no different from what South Korea calls Han-minjok (Korean people) and North Korea calls Joseon-minjok (Korean people).

So, one Koryo-Saram I know said in a disappointed manner, “When I lived there (Central Asia), I thought Koryo-Saram was referring to our people living all over the world, but when I came to Korea (South Korea), it’s just ‘us calling ourselves’ Koryo Saram.’’ Same goes for the Joseonjok from China; they too have experienced reactions of South Koreans not wanting to regard them as the same people, the same ethnicity.

I do not mean to deem the South Koreans as “problematic.” It is just that South Koreans, the Republic of Korea nationals that is, have long regarded their national identity and their ethnicity as the same thing. If you are a Korean national (Hanguk in), your ethnicity is Korean (Han-minjok), and if your ethnicity is Korean (Han-minjok), you are a Korean (Hanguk-in). So, when a compatriot who can't speak Korean comes to Korea, there are quite a lot of people who would ask, “Why can't you speak Korean?” The distinction between biological anthropology and cultural anthropology is made only within the academic setting. It means that “we” have been living this way.

There is an interesting anecdote. A North Korean who works at the immigration office asks a Korean Canadian entering North Korea: “Are you Joseon-jok?” Now, what does this mean? In North Korea, North Korean nationals are Joseon-Saram/ People, and all overseas Koreans are “Joseon-jok.” In other words, there are not only Chinese Joseon-jok, but also American Joseon-jok, Russian Joseon-jok, and Japanese Joseon-jok. Maybe in a few years, (hopefully) when South Koreans enter North Korea, they may be asked, "Are you Korean Joseon-jok?” Then people might fight, protesting, “What do you mean? I’m from Korea, not from China.”

The Cold War and the Division have twisted a lot of things. Just like a skein. It will take a long time to untangle all this. So, for the time being, we would have to get used to being twisted and intertwined.

Finally, it is understandable why Zainichi Koreans living in Japan are so complicated. The fundamental difference is that Japan does not grant Japanese nationality unless Zainichi Koreans go through “naturalization.” It is a different reality compared to Joseonjok in China and Koryo-Saram in the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such as Russia. You might say, “That is intense,” but the truth is, the Chinese living in Korea are faced with the same. There is only “permanent residence” and no “citizenship.”

Two identities compete at this point. Joseon (朝鮮) and Hanguk (韓国) are actually two countries, but the ideological contradiction makes one of them unrecognizable. Those who support the South (南) are satisfied with the name Zainichi Kankokujin (在日韓国人), but those who support North (北) want to be called Zainichi Josenjin (在日朝鮮人). The former has the nationality, that is Republic of Korea, but the latter cannot have any nationality. This is because there is no diplomatic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Joseon (朝鮮, here, meaning North Korea). That is why they call them “Chosen-seki (朝鮮籍, Joseon/Korean domicile) Zainichi.” And here, Joseon means the Joseon Dynasty before the division happened in the peninsula. It is not wrong to say so as they have presumably immigrated to Japan by then. These people cannot travel freely to Korea. Although it may depend on the South Korean government regime, it is not completely free. As a side effect, some people conflate Joseonjok, and Chosen-seki (pronounced as Joseon-jeok in Korean) due to the unfamiliarity and similarity in pronunciation.

I can imagine quite a lot of people who read this far complaining about a headache. A headache is naturally inescapable, since the modern history of Korea and Joseon has been chaotic. And it became even more head-spinning. I am talking about the time approximately after the 1990s.

Haemin Ryu — 4 days ago

Returning compatriots, disappearance of “being-in (재, Jae, 在)”

Words such as “overseas Koreans in America,” “overseas Koreans in Japan,” and “overseas Koreans in England” sound familiar and appropriate in the Korean language. There is no room for confusion, as they immigrated to a foreign country after acquiring Korean citizenship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1948. It sounds reasonable to classify them as “Korean nationals abroad” when they have maintained Korean citizenship, and “overseas Korean” when they have acquired foreign nationality. Predictably, the former has the right to vote and the latter does not. But this recently seems to be changing.

However, it feels a little off to call the Joseonjok as “overseas Korean in China” and the Koryo-Saram as “overseas Korean in Russia.” They have never had a South Korean nationality and also had never been in or out of South Korea for 40 years or more. If they were to come to South Korea, they would have been considered a “spy,” as commonly said. Koreans living in South Korea have always thought that they may share blood, but they live in other countries far away from here. But the situation changed. The Cold War ended and the Red Army collapsed and Red China accelerated its own liberalization. As the economic recession came, those who were in these communist countries once again scattered around the place, and one of the destinations was South Korea. Now, about four and a half centuries since then, around 500,000 Joseonjok and 40,000 Koryo-Saram are living in South Korea. As with all the other immigrants around the world, there will be more population staying undocumented.

Chinese Joseonjok are estimated to have a population of about 2 million around the world, while Koryo-Saram of Russia and the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are together estimated to have about 500,000. If so, about a quarter of the Chinese Joseonjok and about a twelfth of Koryo-Saram are “back in” Korea. For Koryo-Saram, the number would be much higher if the number of those who returned to the Primorye, known as Primorsky Krai, where they have been living prior to their deportation into Central Asia are combined.

Therefore, it became difficult to keep track of their location of “being-in (재, Jae, 在).” In this era of so-called post globalization, movements of people increased in great amounts. Some short-term movements, such as travel and business trips. exist, but there are also mid- and long-term movements, such as studying abroad or relocation for work. In other words, it became normal to always go back and forth over the seas. The distinction in the moving processes between immigration, which was often combined with tears along with the lines of “If I go now, when would I ever come back again!,” and short-term movement as “I will be back soon after this business trip” has disappeared.

For example, in the case of Joseonjok, though South Koreans call them “Chinese Overseas Korean,” they call themselves “compatriots living in Korea.” This manifests the fact that where they are now “being-in (재, Jae, 在)” is not China, but Korea. But with what rights can they say so? Discussions arose, and one of them was “the right to return to their homeland and live.” Although Korea may not be their homeland, it was the home of their ancestors. And even though they wanted to come back, they could not “because of the Cold War and division.” So, it is their conviction that they would at least now in current times insist on returning and living. It is indeed a hard claim to deny.

Some parts of the academic world say that the rights of these returned Overseas Koreans should be granted, maybe not as those of citizenship but “ethinizenship.” They would not immediately be granted a resident's card, but the granting of a special visa belies the intention of the law. The Overseas Korean Visa (F4) and Work and Visit Visa (H2) are part of the workaround. This is again something that a legal professional should talk about, not an amateur like me. However, the problem still remains: Whether the visa should be granted forever or just simply once or twice. The visa is granted only until the age of 3, but why not to a 4-year-old? Should nationality also be given to the children of those who married to an “immigrant” (a person of so-called “mixed-blood”)? This “problem of compatriots” restlessly leads to a host of other ones.

Let us talk “in a nutshell”; Compatriots from “developed countries” such as the United States, Europe, and Japan are admired, but compatriots from “underdeveloped countries” such as Russia, Central Asia are easily disrespected. The people who are capable of thinking logically that “it shouldn’t be” cannot hide from their cognitive dissonance. What do the three letters “com-”, meaning “together with,” stand for?

What does it mean to include all these words in the “Korean diaspora?” Especially in a reality where hierarchy and discrimination is constantly formed, how the fame of the pop star Eric Nam prolong and that of Baek Chung Kang compare? Diaspora is an unnecessary word now. There is no such diaspora. No, there shouldn’t be.

Haemin Ryu — 4 days ago

Conclusion

Alina is an overseas Korean in Ukraine. Her mother is a Koryo-Saram, and her father is a German. This “German” part alone would require at least one page, and therefore, it will be skipped here. She finished her bachelor’s degree in Ukraine and got her master’s degree at one of the South Korean SKY universities. Later on, she fell in love with a Korean American, married him, and went to the United States. She went through all these states of “being-ins” in the Soviet Union, Ukraine, South Korea, and finally, the United States. Described along the terms in the Korean language, it would sound like this; Jae So (재소 在蘇), Jae-Wu (재우 在乌), Jae-Han (재한 在韓), Jae-Mi (재미 在美). I listed all these with an intention to show how ridiculous this way of describing the state is.

Around the same period, I visited a city called Ussuriysk, located in Primorsky Krai, Russia. I met two of our female “compatriots” selling vegetables in a market place. As we talked, I discovered that one lady was a Chinese Joseonjok, and the other lady was a Koryo-Saram from Uzbekistan. These two ladies met each other in their middle age and are now partnering with each other financially. I said to the Joseonjok lady, “You speak perfect Korean.” However, she replied, “I don’t know Korean. I just know Joseon-ese.” This answer struck me with great astonishment.

Let us, with no other option, use this English word, “Korean.” I only gave two examples above, but there are an infinite number of possibilities for the case of “moving Koreans.” And of course, they from time to time collide into each other. What would it become if this word Korean is “translated” into Korean (한국어) that is our own language? Goryeoin (고려인) is probably the closest. We are all Goryeoin (고려인), Diaspora or not.

Haemin Ryu — 4 days ago

0. 들어가며

Haemin Ryu — 2021.5.19 01:52 AM

대한민국 체류 이주민 230만 명의 시대이다. 2018년 기준 159,206명의 혼인이주민 중 남성은 26,815명, 여성은 132,391명이다. 이주의 여성화라고 불리울 정도로, 혼인이주민 중 여성의 비율은 높다. 90년대 들어 시작된 혼인이주는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한국 내에 국제결혼, 다문화, 재한외국인, 간이귀화 등의 법과 제도를 형성하며 뿌리내리고 있다. 한국의 혼인이주와 관련한 법제도는 많은 변천을 겪어왔다. ‘안전한 국경관리’(출입국관리법의 목적 중), ‘대한민국 국민과 재한외국인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사회 환경’(재한외국인처우기본법 목적 중), ‘안정적인 가족생활의 영위’(다문화가족지원법 목적 중)를 위한 법령의 교차점 위에 서 있는 혼인이주여성들은 현실 세계에서 과연 어떠한 구성원으로 취급되고, 또 대한민국 내에 통합되기 위해서 요구되는 ‘자질’ 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Haemin Ryu — 2021.5.19 01:53 AM

1. 혼인이주여성의 정의

Haemin Ryu — 2021.5.19 01:53 AM

‘혼인이주여성’을 법률상 용어로 정의하고 있는 법령은 없다. 재한외국인처우기본법에서는 ‘결혼이민자’를 ‘대한민국 국민과 혼인한 적이 있거나 혼인관계에 있는 재한외국인’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결혼이민자에 대하여 국어교육, 대한민국의 제도와 문화에 대한 교육, 결혼이민자의 자녀에 대한 보육 및 교육 지원, 의료 지원 등을 통해 결혼이민자 및 그 자녀가 대한민국 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제12조). ‘다문화가족지원법’은 위 재한외국인처우법상 ‘결혼이민자’의 정의를 인용하고 있다. 참고로 ‘다문화가족’은 ‘결혼이민자’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자로 이루어진 가족을 의미한다. 즉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만으로 구성된 가족은 법상‘다문화가족’이 아니다. ‘출입국관리법’은 결혼이민자에 대한 특칙규정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배우자인 외국인’으로 결혼이민자를 축소 정의하고 있다. 재한외국인처우기본법은 혼인관계가 종료된 사람도 결혼이민자에 포함하고 있지만 출입국관리법은 현재 결혼, 즉 법률혼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사람에 한하여 가정폭력의 피해를 입은 경우 조사를 포함한 권리구제기간 동안 체류자격 연장을 해주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든 결혼이민자는 원칙적으로 한국 국적의 배우자와 ‘결혼한 상태’ 이거나, ‘결혼 했었던 상태’ 임이 입증되는 사람의 경우에 해당한다. 한편, 결혼이민의 체류자격이 도과한 사람의 경우에는 법률혼이 유지되고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불법체류자’ 라는 계급을 부여한다. 체류자격 연장을 하지 못하는 경우는 다양하다. 한국인 배우자와의 갈등으로 집을 나온 경우, 혼인의 진정성이 출입국 사무소로부터 의심을 받는 경우, 국세나 의료보험 비용을 체납한 경우 등 외에도 다양한 사유로 결혼이민자는 쉽게 불법체류자가 된다.

Haemin Ryu — 2021.5.19 01:54 AM

2. 혼인이주여성의 체류과정

Haemin Ryu — 2021.5.19 01:55 AM

가. 입국

혼인 당시부터 한국인 배우자에게 경제적, 법적인 의존을 전제하고 있는 현행 혼인이주제도는 결혼이민자를 가부장적 가족 구조 내부로 편입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결혼이민자와 대한민국에서 함께 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대한민국의 가족관계등록관서에 대한 혼인신고. 이 때에는 한국 법과 결혼이민자의 국적국의 법상 혼인의 요건을 충족하여야 한다. 그 후 한국인 배우자가 대한민국 내에서 배우자를 초청하기 위한 서류를 제출한다. 신원보증서, 즉 결혼이민자가 대한민국에서 체류하는 데 드는 비용을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맹세하는 서류를 내고,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는지 그 상세한 경위를 진술하고, 기본증명서 등 가족관계 서류와 소득요건 및 주거요건 - 즉 피초청인을 먹여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입증하는 - 입증 서류를 제출한다. 재외공관의 심사를 거쳐 비자 발급이 승인되면 6개월 간 체류할 수 있는 체류자격을 부여하고 비자를 내어준다. 결혼이민자는 혼인신고 후 위 절차를 모두 거쳐 비로소 동거에 이르게 된다.

한편, 이러한 재외공관의 심사 결과 비자 발급이 불허된 경우,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일반적으로 행정청의 처분에 대해서 행정소송으로 다툴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지만, 이 경우는 그렇지 않다. 대법원은 2018. 5. 15. 선고 2014두42506 판결에서 재외공관 총영사의 사증발급 거부행위에 대해 다툴 수 있는 원고적격이 해당 결혼이민(을 시도하는)자에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소 각하를 선고하였다.

구체적 내용은 이러하다. 한국인 남성 A는 국제결혼중개업체를 통해 4박 5일간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인 여성인 원고를 소개받은 후 혼인신고를 하였다. 원고는 A와 혼인하였음을 이유로, 혼인 직후부터 매년 1차례씩 한국총영사관총영사(피고)에게 결혼이민(F-6) 체류자격의 사증발급을 네 차례 신청하였다. 그러나 피고는 A의 거주지를 관할하는 출입국관리사무소 소속 공무원의 실태조사를 거쳐 ‘A의 가족부양능력 결여’ 등을 이유로 원고에 대한 사증발급을 네 차례 모두 거부하였다. 대법원은 이에 대해 ① 사증발급은 입국허가의 추천으로서의 성질을 가지는 점, ②출입국관리법의 입법목적은 대한민국의 공익을 보호하는 것일 뿐 외국인의 사익까지 보호하는 것이 아닌 점, ③사증발급 신청인인 외국인은 대한민국에 입국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대한민국과의 실질적 관련성 내지 대한민국에서 법적으로 보호가치 있는 이해관계를 형성한 경우가 아닌 점 등을 이유로 들어 사증발급거부처분의 취소를 구할 법률상 이익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최계영 교수는 이에 대해 ‘사증발급거부를 다툴 수 없다고 한다면, 행정청이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법령상의 요건을 정확히 해석·적용하였는지 통제할 방법은 없다’고 비판하였다. 실제 이 사건의 원심은 총영사관이 소득을 잘못 파악하여 부당한 처분을 내렸다고 판시하였다.

나. 체류

국민의 배우자가 된 결혼이민자는 체류자격(약호 F-6)을 연장하면서 대한민국에 계속 체류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주권을 취득하거나, 귀화를 통한 국적 취득을 할 수도 있다. 법률혼 관계가 계속되는 경우 결혼이민자는 체류자격이 계속 연장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출입국사무소는 혼인의 진정성이 의심되는 경우에는 체류자격 연장 불허 처분을 한다. ‘혼인의 진정성’ 이란 무엇일까? 가령 경제 활동을 이유로 주중에는 다른 지역에서 생활하고 주말에는 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부부가 존재한다고 치자. 한국 국적의 부부라면 이를 ‘주말 부부’라고 하겠지만, 결혼이민자와 한국인 배우자의 경우에는 ‘혼인의 진정성이 없는 부부’가 된다. 갈등이 깊어져 다툰 후 한 쪽이 집을 나가 따로 살면 어떻게 될까? 체류연장이 불허되고 해당 부부는 국가에 의해 재결합을 모색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각각 다른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

다. 혼인의 단절

혼인 단절 후 대한민국에서 계속 체류할 수 있는 결혼이민자(영주권자나 국적취득을 한 경우는 논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국민과 혼인관계에서 출생한 미성년자녀를 양육하거나 면접교섭권을 가지는 경우, 혹은 자신에게 책임이 없는 사유로 혼인 관계가 단절된 경우. 미성년자의 양육을 위하여, 미성년인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인 결혼이민자는 한국에서 계속 체류할 수 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이후에는 불가능하다. 변경이 가능한 체류자격도 없다. 최근에 인정되기 시작한 면접교섭권의 경우, 상대방 측의 방해 등으로 면접교섭을 이행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체류자격 연장에 불리한 요소로 판단하는 일이 많아 문제점이 있다.

한국인 배우자의 사망, 실종 또는 자신에게 책임이 없는 사유로 인하여 정상적인 혼인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자의 경우, 한국에 계속 체류가 가능하다. 사망 내지 실종은 관련 증명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문제는 자신에게 책임이 없는 사유의 증명이다. 출입국 사무소는 이를 ‘100% 한국인 배우자 귀책사유’로 해석한다. 가정폭력사실확인서, 병원 진단서, 기소 혹은 불기소 결정문 등을 제출하라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혼 판결문에 기재된 귀책사유의 존부이다.

남편, 시어머니의 부당한 대우를 견딘 끝에 별거 후 이혼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고 체류자격의 연장을 신청한 결혼이민자는, 승소 판결문에도 불구하고 ‘배우자의 전적인 귀책사유를 인정할 수 없다’ 며 출입국사무소에서 연장 불허처분을 받았다. 대법원은 이에 대해 ‘자신에게 주된 책임이 없는 사유로 정상적인 혼인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 즉 혼인파탄의 주된 귀책사유가 국민인 배우자에게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 체류자격 거부처분 취소소송에서 처분사유에 관한 증명책임은 피고인 행정청에게 있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미 가정법원에서 확정판결로 국민인 배우자가 외국인 배우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할 것을 선고하였다면 출입국관리 행정청과 행정법원 역시 이를 존중하여야 한다.’고 판시하여, 행정청이 가정법원의 판결을 존중하지 않는 행정 관행을 지적함과 동시에 ‘주된 귀책사유’로 이혼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기준을 설정하였다.

Haemin Ryu — 2021.5.19 01:58 AM

3. 제도가 지닌 차별적 요소들

Haemin Ryu — 2021.5.19 01:58 AM

가. 결혼이주민의 범위

‘재한외국인처우기본법’은 재한 외국인을 적법한 체류자격을 가진 외국인으로 한정한다. 결혼이주민 역시 한국인과 결혼하여 한국에서 체류 중인 자로 한정하고 있다. 이러한 법적 정의가 낳은 공백은 국내에 체류중인 이주민 전반을 아우르는 정책의 설정과정에서 미등록 이주민, 결혼이주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결혼이주민 등 진정으로 국가가 관심을 가지고 대책을 마련하여야 할 소외 계층에 대한 내용을 소거하는 결과를 낳는다. 대한민국의 외국인 체류 및 사회통합에 관한 정책은 결국 근시안적이고 대책 위주의 땜질 처방으로 이어진다.

한국에 정착하여 장기체류하고 있는 외국인과 결혼한 혼인이주여성의 경우, 보호나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 자신의 사회적 지지기반이 존재하지 않고, 법 지식 및 구조에 대한 접근성이 낮으며, 불안정한 체류상태에 놓여있는 등 한국인과 혼인한 이주민과 보호의 필요성 측면에서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혼인 단절 후 체류를 비롯한 여러 특별법상의 지원에서도 제외되고 있다.

나. 혼인중의 자와 혼인외의 자에 대한 차별

국민과의 혼인 관계에서 출생한 자녀를 한국에서 양육하는 경우, 체류자격 연장이 가능하지만 혼인관계가 아닌 국민과의 사이에서 출생한 이른바 ‘혼인 외의 자’를 양육하는 경우는 체류자격을 비롯하여 어떠한 권리도 인정되지 않는다. 예컨대 국적법상 간이귀화의 경우, 한국인과 혼인 중 출생하여 양육중인 자녀가 있다면 그 대상에 해당하지만 혼인 외 출생한 자녀를 홀로 양육하고 있는 한부모의 경우 일반귀화 외에는 할 수 없다. 간이귀화와 일반귀화의 가장 큰 차이는 소득 요건 입증의 난이도인데, 6,000만원 이상의 자산을 요구하는 일반귀화의 요건을 충족시키기는 한부모, 특히 외국 국적자가 부모인 가정에서는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한부모가족지원법, 다문화가족지원법 등 여러 형태의 지원이 필요한 가정에 대한 특별법에 근거한 제도 역시 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다. 혼인 파탄 후의 체류

한국에 계속 체류하기 위해서는 합의 이혼을 해서는 안되고, 재산분할은 못 하더라도 반드시 위자료를 청구하여야만 하며, 조정에 의한 이혼 시에도 위자료를 받아야만 한다. 이를 위해 상대방과 원만한 합의를 통하여 혼인관계를 단절하는 방법은 차단되고, 관계 회복을 위하여 가정법원에서 시도하고 있는 상담 내지 심리치료 등은 결혼이민자와 한국인 배우자에게는 유명무실한 서비스이다. 조정전치주의를 택하고 있는 가사소송법상의 대원칙과도 맞지 않다. 계속 체류를 위하여는 싸워서 승리하여야 한다! 결혼이민자들은 원만한 이혼이 아닌 귀책사유 입증을 위해 갈등을 부추기는 이혼 과정으로 내몰리고 있다.

Haemin Ryu — 2021.5.19 01:59 AM

4. 결론

Haemin Ryu — 2021.5.19 02:00 AM

2019년, 유엔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대한민국 정부에 대하여 ‘결혼이주민’들이 혼인관계 종료사유, 자녀양육여부, 한국인배우자 가족 부양여부 등과 관계없이 체류자격을 변경하여 혼인관계가 종료된 이후에도 그들이 한국에 체류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권고하였다. 또한 ‘다문화가정’의 개념 정의를 ‘최소한 한 사람이 한국 국민이 아닌 경우를 모두 포함’ 하는 것으로 변경하여 차별 없이 복지 적용이 가능하도록 할 것을 권고하였다.

대한민국 헌법은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제36조 제1항)고 규정하고 있다. 혼인과 가족생활의 유지보다 앞서는 것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이다. 과연 현행 출입국 관리 제도와 다문화가족지원법 등은 이러한 개인의 존엄성을 보호하는 방향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것인가? 양성의 평등을 장려하고 결과적으로 촉진되었음을 공언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로서는 그러한 방향성조차 가지고 있다고 보기 힘들 것이다.

Haemin Ryu — 2021.5.19 02:00 AM

이진혜는 이주민센터 친구의 상근변호사로 일하고 있으며, 이주여성, 이주아동의 인권과 인종 차별과 혐오 표현 등에 관심이 많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이주 연대, 이주배경 아동 청소년의 기본권 향상을 위한 네트워크 등의 연대 활동을 하고 있다.

Haemin Ryu — 2021.5.19 02:01 AM

1. Existentialism and the Third World

Haemin Ryu — 2021.5.19 02:03 AM

The Cold War following the traumatic experiences of enduring warfare forced the Korean intellectuals to distort the political implication of the global philosophical movements and emphasize its empirical elements through their translations of Sartre. Sartre’s influence on the Korean intellectuals was deceived by the ideology of the Cold War and their reception of his philosophy was saturated with the myth of Bildung. For them, existentialism was regarded as a channel through which they could get access to the cosmopolitan ideals of the Enlightenment. Of course, there lied the irony of national identification behind this passion for global intellectualism.
Nationalism made an excuse for reading Sartre, even though his philosophy must be classified Leftist thought. Existentialism is clearly supportive of the Third World against the political polarization of the Cold War. From the nationalist perspective, existentialism showed a possible way towards the philosophy of the non-Europeans, but at the same time, it seemed pro-communist to those who agreed with the anti-communist world order. The Korean War devastated the public sphere and the frame of the Cold War severed a nation to two peoples. Each Korea competed to command ideological hegemony in the political conflict. In this way, existentialism served as the alternative prism of intellectualism by which Koreans in the South could critique the Stalinist Koreans in the North.
Indeed, Sartre was a symbolic intellectual leading the anti-Stalinist left and as such, suggested another perspective contra orthodox Marxist-Leninism. During the colonial period, Keijo Imperial University, now Seoul National University in the capital city of the Korean Peninsula, was a shelter for Japanese Marxists and its academic tradition of Marxism influenced many Korean students and scholars even after the end of the Second World War. In a sense, North Korea was a perfect laboratory for them in which they tried to bring the Marxist theory to reality. Drawing on Lenin’s and Stalin’s ambition about the “reform in humanity,” Koreans taking on North Korea as their republic were optimistic about the victory of socialism. On the contrary, Koreans in the South had to prove their ideological justification in opposition to the overwhelming popularity of the socialist demand. From this historical background, Sartre’s critique of Stalinism provided those who railed against North Korea with compelling logic to validate their anti-communism.
This situation in which the intellectuals in South Korea received Sartre was quite the opposite of the one in which existentialism was taken as the theoretical rationale of the non-aligned movement in the Third World. For instance, Sartre was the only European philosopher attracting public attention in the Middle East. Furthermore, his engagement in the political situations of the Third World changed the view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West and the non-West. According to Yoav di-Capua,

On both sides of the Mediterranean, Sartre, his intellectual circle, and their new Arab interlocutors were eager to demonstrate that, against the polarizing logic of the Cold War and the sociopolitical stagnation of Europe, decolonization could produce revolutionary societies that were as egalitarian, free, and patriotic as they were anti-imperialist and humanistic. For Europeans of the Left and colonized people of recently liberated domains, that, in a nutshell, was the promise of Third Worldism, and, far from being a provincial African, Asian, or Arab project, it was, in a variation on the old theme of colonial universality, a promising universal counter-project of its own. (2018: 2)

Existentialism shaped the new idea of counter-universality, and further paved the way towards “Third Worldism” for both Western and non-Western intellectuals. What is this “Third Worldism” then? It is merely the sublimation of the Cold War, the conflict of two ideological poles, the US and the USSR in particular. Many thinkers of decolonization in the Third World, such as Franz Fanon, inspired Sartre and his philosophical circle in France. Without the political movements in the former colonial countries, the mapping out of European thought would be unlike what we know today. However, it is undeniable that the non-European reception of existentialism was rooted in a deep longing for the European tradition. Even in the Middle East, the grammar of existentialism was often used to flesh out the meaning of a “new Arab man,” i.e., an Arab man as a cosmopolitan citizen.
Existentialism embraced various ideological opinions and furthered the politically contradictory commitments; on the one hand, the philosophical movement promised the non-European intellectuals a cosmopolitan vision, and, on the other hand, the hidden impetus behind it was the national sentiments oriented by local identities. Therefore, the Korean right wing’s appropriation of existentialism was not exceptional. For them, existentialism was the way in which they could decolonize their world and create a new country in the postwar world order. Even though existentialism was a global movement, its practice was always already entrapped by the national question.

Haemin Ryu — 2021.5.19 02:04 AM

2. The National Question

Haemin Ryu — 2021.5.19 02:05 AM

The ambiguity of existentialism revolving around the national question explains the dilemma of the nation-state in the period of the Cold War. The rapid collapse of Sartre’s reputation in the Arab world after the Six-Day War, when he signed the pro-Zionist petition, proved that the honeymoon period between existentialism and nationalism could not last forever. This split is not the problem of existentialism as such, but the subject-matter internalized within the logic of a particular nation-state. The crucial point of the thesis was already revealed in Rosa Luxemburg’s critique of Lenin’s argument on the right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 Rosa Luxemburg indicated the discrepancy between theoretical socialism and workers’ movement then, i.e., the workers felt socialism indirectly under the influence of nationalism (1976: 157). This was because the procedure of the socialist revolution was international, but the interests of workers were national. This situation seems quite similar to what transpired with Cold War existentialism.
Therefore, the question of nationality cannot be solved by merely emphasizing the class interests of the proletariat. Class orientation already incorporates the question of the nation-state. For this reason, it is non-Marxist to presuppose the absolute right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 because such a right is induced by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a nation-state. Instead, its historical circumstance must be analyzed to understand the structure of nationalism. The national self-determination is not self-evident. She argued as follows:

We should first consider the idea of a nation-state. In order to evaluate this concept accurately, it is first necessary to search for historical substance in the idea, to see what is actually hiding behind the mask … Naturally, we are not speaking here of a nationality as a specific ethnic or cultural group. Such nationality is, of course, separate and distinct from the bourgeois aspect; national peculiarities had already existed for centuries. But here we are concerned with national movements as an element of political life, with the aspirations of establishing a so-called nation-state; then the connection between those movements and the bourgeois era is unquestionable. (1976: 159-160)

In short, the nation-state is the modern invention of technology to govern the population but does not stop at the instrumental level. The ghostly objectivity of a nation is brought by the political theory of governance. The whole process of building a nation-state comes along with the secularization and rationalization of sovereignty. Rosa Luxemburg’s analysis of the nation-state aims at clarifying its historical characteristics, i.e., the link between national movements and bourgeois’ political success. Unlike Lenin, who regarded the national question as a means of the social democracy in Russia and a slogan to unite the oppressed nationalities under the name of the working class, Rosa Luxemburg would shed light on the dissensus between the national question and socialism.
Lenin’s defense of self-determination was a temporal tactic, in that he could not ignore the rise of the national consciousness resisting empires and imperialism, even agreeing with the presupposition that a nation-state is the by-product of bourgeois’ historic victory. Therefore, Lenin argued that “to accuse those who support freedom of self-determination, i.e., freedom to secede, of encouraging separation, is foolish and hypocritical as accusing those who advocate freedom of divorce of encouraging the destruction of family ties”(1964: 422). Lenin believed that the strength of a nation-state would fall away when socialism gradually gains political stability. Needless to say, Lenin’s sanguine vision of the interaction between nationalism and socialism is not easily acceptable today. Even worse, the ascension of nationalism which dovetailed with populism, has dismissed the socialist internationalism in each historical stage.
Lenin considered nationalism as an ideological medium to mobilize people to configure the future of socialism. However, nationalism does not fade away but has revived whenever the national interests overwhelm the international cause. For instance, Stalin following Lenin’s presupposition ordered the Korean Communist Party to change its name to the Korean Labor Party and to build a nation-state, because he believed that the Korean decolonization had to come along with the bourgeois revolution under the banner of nationalism. The urgent task of the Korean Labor Party, now the only ruling party in North Korea, was to transform the peasantry to the working class. The so-called “classifization” was one of the main doctrines in North Korea’s economic policy after the Korean War. North Korea’s obsession with national security and their excuse to develop nuclear weapons for the national right of self-determination proved that Rosa Luxemburg’s national question was left unresolved. Lenin seemed to underestimate the materiality of the nation-state. The rise and fall of existentialism in the era of the Cold War also follows on the heels of socialism. Of course, this problem is not merely attributed to the failure of the leftist experiment but could be internalized in any form of internationalism. Any attempt to be international would have to face up with the national question. Let’s discuss this dilemma in considering the paradox of a nation-state.

Haemin Ryu — 2021.5.19 02:05 AM

3. Refugee Ontology

Haemin Ryu — 2021.5.19 02:06 AM

The postwar world order is the reconstruction of global capitalism led by the US. However, the identity of the US is to some point ambivalent as well. The country plays a role of the empire, while insisting upon its national interests. Its domestic politics is inclined to affirm national identity, provided that its rule of global security works as if the country is a new empire after the Second World War. The anti-communism of the Cold War was in this sense the strategic ideology to bridge the gap between a nation-state and empire vis-à-vis the identity of the US. In my opinion, the Cold War politics after the Korean War was an international project to bring forth a nation-state in the colonized countries.
Above all, Woodrow Wilson’s liberal internationalism, an anti-communist response to Lenin’s idea of the national self-determination, successfully roused the national movements in some Asian countries. Korea was one of those places where the early bourgeois nationalists discovered in Wilson’s concept of self-determination the logical justification of their movements. The early national movements in Korea would have sooner or later adopted socialism or fascism.
The invention of the national identity, i.e., the imagined community, forges the recognition of the colonized and the passion towards the sublime object of one nation. In this way, the materiality of a nation-state comes to gain the symbolic dimension of existence. The symbolic ontology of a nation-state constructs the ideological core of nationalism, in a sense, the logic of form from within. In my view, this process of ideological symbolization is the essence of modernity.
Modernity, as the human condition, is another angle of a nation-state. To some point, the self-consciousness of the colonized is the offshoot of modernity, in that it relies on the feeling of the lost nation, which never existed, but allegedly ever being there in the past. The concept of self-determination endows them with the means to link concrete individuality to abstract nationality. The republic is as Thomas Hobbes described the gigantic body of sovereignty. Once being this imaginary corpus of one nation is fabricated, the dialectic of inclusion and exclusion starts is actualized . The inclusive and exclusive mechanisms give rise to the discrimination as to who is included in the nation and who is excluded from the nation, and then the question of refugees emerges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the nation-state. The presence of refugees is the heart of darkness in the modern nation-building, resorting to the concept of the national right of self-determination.
In this sense, the refugee problem is not only a political issue, but also the dark utopia of modernity that nationalism promises. There are many definitions to indicate the risky aspects of human life in the condition of modernity such as liquidity, precariousness, worldlessness, and so on. However, the essence of modern life is its homelessness. In this sense, the status of a refugee is not the particular mode of human beings, but rather the general condition of human existence in the modern world. The homeostasis of such an “in-between nation-states” status could be called “refugee ontology.” As has been discussed, there have been two indicators by which we can approach the existential question of a refugee since the thought of the European enlightenment, which is nationalism and cosmopolitanism. It is interesting that the status of a refugee was not seen as pitiful before the advent of the nation-state. For instance, Hugh de Saint Victor, a medieval monk in the 12th century, wrote the following:

The person who finds his homeland sweet is a tender beginner; he to whom every soil is as his native one is already strong; but he is perfect to whom the entire world is as a foreign place. The tender soul has fixed his love on one spot in the world; the strong person has extended his love to all places; the perfect man has extinguished his. (1991: 101)

In his writing, Hugh de Saint Victor claimed the state of exile and celebrated the expatriate life. Interestingly, he described the deportee as “the strong person.” He praised “a foreign soil” because “it gives a man practice.” There is no modern sense of a refugee as a commiserative creature, but rather the archetypal figure of a cosmopolitan here. For Hugh de Saint Victor, “the strong person” is “those who philosophize,” experiencing all the world as “a foreign soil.”
The term “refugee” was invented in the 17th century and referred to Protestants who fled France following recall in 1685 of the Edict of Nantes, granting religious liberty and civil rights to them. Within a decade since then, the word came to indicate that those who are forced to flee to a safe place. The meaning of a refugee here gains the exactly opposite connotation to Hugh de Saint Victor’s “the strong person,” the cosmopolitan image. As Immanuel Kant suggests, the ultimate goal of enlightened maturity for a civilized human being is to be cosmopolitan, not to limit him or herself to the national border. However, the status of the refugee in the modern sense shows a disturbing aspect to the enlightenment project. The refugee is being evicted, dispossessed, and excluded from the nation-state, and a preliminary stance before being captured by a particular state. He or she qua refugee lives in the inter-national space, i.e., the borderline between the nation-states. The status of a refugee is not just temporary, but instead tells us the substantial meaning of life today, the life which is trapped by the national question.
This is not the problem of the enlightenment as such. What is at stake here is the question as to why the Kantian project, i.e., becoming a cosmopolitan, fails, and why people quickly become refugees rather than inter-national beings. As Hannah Arendt points out, “once they had left their homeland they remained homeless, once they had left their state they became stateless; once they had been deprived of their human rights they were rightless, the scum of the earth”(2007: 267). With the discussion of a refugee, Arendt reveals that it is difficult to insist upon human rights in general, if people do not belong to a specific national territory within any borders. Refugees are nothing less than homeless, stateless, rightless people who are ripped out of loci; in other words, they turn to be “the scum of the earth” when they leave off the borders of any nation-state.
Nationality is the pre-condition to human rights. The right of a man is not automatically given by natural law, but rather obtained by the citizenship of nationality. This is the paradox of the human ontology in the modern age; we, human beings, have no self-evident right to reside in any place without nationality, even if he or she travels around the international borders. Rosa Luxemburg’s insight on the national question returns at this point. There is no such thing as the absolute right of self-determination except in a nation-state as a historical phenomenon.
The real borders are nationality as such; if anybody fails to have it, he or she would be regarded as “the scum of the earth.” Who or what is “the scum of the earth”? It means that refugees, those who do not have any national identification, are useless. Why useless? It is because they have no legal right to work within any nation-state. Refugees are useless because they cannot be easily exchanged in the national relations of production. If a refugee wants to be exchanged in a specific nation-state, he or she must become commodities. Global capitalism, the new economic relationship among the nation-states, means that only a commodity can freely cross national borders. The commodity is the opposite being of a refugee. Intermingling with the refugee problem is not about human rights, but the global division of labor in capitalism.
The presence of refugees forces us to rethink the political implication of the nation-state. The modern system of nationality is the by-product of nationalism conforming to bourgeois economic interests. It is impossible to abolish it from without, but necessary to reconstruct it from within, because national consciousness, as Rosa Luxemburg clarifies, is used to mobilize the working classes in the competition to establish a strong nation-state. The paradox of the Cold War ideology is revealed in this conformism. The anti-communism of the Cold War necessarily required international relations to help the nation-building of each country once colonized, but at the same time resulted in the national identity by international recognition. In this sense, it is not exceptional that the rise of the nation-states is observed after the end of the Cold War. The crisis of capitalism at the global level has also encouraged the prioritization of national interests over international collaborations. Now, we are about to witness the return of the national question since its emergence in the 1930s.

Haemin Ryu — 2021.5.19 02:06 AM

Conclusion

Haemin Ryu — 2021.5.19 02:07 AM

The sense of a nation-state is not self-evident. What is called Asia, where we live, implies, therefore, many questions in relation to nationalism. The region named Asia was culturally defined after the Japan-Russian War and geopolitically designed after the Second World War. Modern Asia was the historical by-product of colonialism and its effects; the rise of nationalism in Asia was in a sense, the collective resistance to colonial modernization. Modernity in Asia has been the consequence of the dialectical process between modernization and counter-modernization.
The Cold War and the Third World Movements were inscribed within the “Asian mode of production,” and the authoritarian capitalism is already always the homeostasis of modern Asia. Its complicated historical background registers the strong demand of “Asian theory” for analyzing the structure of Asian modernity. It is because Asian modernity is another side of global capitalism and its plan of nation-building still works out for achieving economic prosperity.
There would be no such Asian modernity, but rather the extreme realization of modernity in general. The extremity of Asian modernity invites us to discuss the meaning of modernization in the global scope before and after the two world wars. Colonialism and the Cold War are examples that continue to demand a new theoretical perspective. The pursuit of Asian theory presupposes the theoretical intervention into Asian situations as well as the role of theory in mapping out the geographical constitution of modernity as such.

Haemin Ryu — 2021.5.19 02:07 AM

Bibliography

Haemin Ryu — 2021.5.19 02:08 AM

Arendt, Hannah.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New York: Harcourt, 1973.
De Saint Victor, Hugh. The Didascalicon of Hugh of Saint Victor: A Guide to the Arts. Translated by Jerome Taylor.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1.
Di-Capua, Yoav. No Exit: Arab Existentialism, Jean-Paul Sartre, and Decolonizat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8.
Lenin, Vladimir Ilyich. Collected Works. Volume 20.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64.
Luxemburg, Rosa. The National Question: Selected Writings. Edited by Horace B. Davis.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76.

Haemin Ryu — 2021.5.19 02:08 AM
Haemin Ryu — 2021.5.14 03:17 AM
Haemin Ryu — 2021.5.14 03:19 AM
Haemin Ryu — 2021.5.14 03:20 AM
Haemin Ryu — 2021.5.14 03:22 AM
Haemin Ryu — 2021.5.14 03:23 AM

대림동
장소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전개된 논의는 일견 특정한 장소를 어떻게 기억하고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과 닮아있다. 중국 푸젠성의 항구 도시 샤먼(厦门)에 가까운 타이완의 섬 진먼(金門)을 다룬 영화 ⟨해협⟩(2019)이나 부산의 사라진 행정동인 범전동의 풍경을 다룬 ⟨범전⟩(2015) 등에서 오민욱은 과거에 그곳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을 리서치하고 그 자료들을 현재 시점에서 촬영한 이미지와 결합하는 방법으로 장소를 기록해 왔다. 이 영상들은 진실로서 통용되는 사실 관계를 기반으로 촬영되긴 했지만 오민욱은 ‘완벽한 확신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영화'에 대해 항상 의심한다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 스스로도 다큐멘터리적인 영화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이것이 실제이자 진짜라고 말하는 것을 항상 의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로 지나가버린 시간을 붙잡아놓는 영상 매체의 기록은 오민욱에게 오히려 이 화면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더 적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런 측면에서 장소는 이미 존재하는 완성된 무언가라기 보다 구성되어지는 수행적인 측면의 성격이 강하다.

이번 전시에서 오민욱이 보여주는 ⟨도림로 29길⟩(2019)은 그가 지금까지 공간을 기록하는 방식과 정반대의 접근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러닝룸⟫에서 영화 ⟨해협⟩을 위해 중국 샤먼에서 촬영했지만 최종본에는 담지 않은 영상 데이터를 보여주었고, 그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제작된 ⟨도림로 29길⟩은 사전 정보 없이 대림역 근처 도림로 29길에 도착해서 하나의 프레임으로 담아낸 풍경 이미지와 소리를 10분 53초라는 타임라인 안에서 레이어간 시차가 겹쳐지도록 편집했다. 이렇게 겹쳐진 도림로 29길의 풍경은 오민욱이 고민했던 프레임 바깥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담아낸 것일까, 아니면 장소는 재현될 수 없는 것일까. ⟨도림로 29길⟩은 장소와 기억의 관계를 질문한다.

조기현의 ⟨투명한 막–어안 렌즈, 일출, 부재⟩(2019)는 이 전시에서 대림동의 풍경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영상 작업이다. 이 영상은 왜곡이 심한 어안 렌즈로 새벽 시간의 대림동을 담았고 1초당 120프레임으로 의도적으로 천천히 풍경을 볼 수 있게 편집했다. 이를 투사하는 스크린도 오목한 굴곡을 주어서 화면의 왜곡을 더욱 강조한다. 내러티브 없이 42분 동안 흘러가는 영상은 제목에서처럼 새벽 시간의 빈 대림동을 담았다. 서울의 법정동 중 한곳인 대림동은 언제부턴가 조선족 혹은 중국이라는 단어와 동일시되고, 중국인이나 대림동을 향한 편견과 혐오가 만연한 것이 사실이다. 조기현은 이 영상 설치를 거울에 비유하는데, 마치 볼록거울과 오목거울처럼 렌즈와 스크린은 쌍을 이루며 그 앞에 앉은 관람자 한 명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빈 공간으로 은유된 새벽 시간의 대림동은 이곳에 투영된 혐오와 차별까지도 비운 상태로 보여줄 수 있을까.

중국 조선족
50대 아빠를 돌보는 청년 보호자이기도 한 조기현은 최근 지난 9년의 기록을 담은 에세이 『아빠의 아빠가 됐다』(2019)를 출간하기도 했는데, ⟨불투명한 막–클로즈업, 간병, 신체⟩(2019)는 중국 동포이자 간병 노동자인 조혜리가 병원에서 촬영한 영상을 여러 겹의 샤 원단에 투사한 작업이다. 7분 52초의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이 영상에서는 요양 병원에서 돌봄이라는 행위가 어떻게 수행되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간병 노동자가 어르신의 신체를 물티슈로 닦아내고, 양치는 어떤 방식으로 가능하고, 어르신들이 가장 오래 지내는 침대는 어떻게 관리되는지. 이 영상은 또한 이렇게 노쇠하고 혼자 무언가 해결할 수 없는, 돌봄이라는 관계가 반드시 필요할 때 인지되는 신체를 관객의 신체에 대한 스크린의 논의와 연결시켜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는 조기현이 ⟪러닝룸⟫에서 토마스 엘새서(Thomas Elsaesser)를 인용했던 “⟨노동의 싱글숏⟩의 목표, 말하자면 그것의 비판적이고도 해방적인 임무란 우리로 하여금 [노동을] 다시 보게 하는 것, 뤼미에르적 제약에 집중된 주의력을 세부, 몸짓, 과정을 발견하거나 재발견하는 데 쓰는 것”이라는 부분을 상기시킨다.

조선족과 협업한 작업은 반재하의 ⟨표백된 무대⟩(2019)와 ⟨무대 의상⟩(2019)으로 이어진다. 퍼포먼스와 연극성에 관심을 두고 있는 반재하는 중국 동포이자 소위 한국에 ‘잘 적응한’ 서남권 글로벌센터의 전문 상담사이자 사단법인 조각보의 공동 대표인 박연희를 인터뷰한 영상으로 ⟨표백된 무대⟩를, 그의 취향을 반영한 맞춤옷 ⟨무대 의상⟩을 제작했다. 여기서 잘 적응했다는 기준의 적용은 다문화주의라는 명분하에 한국 사회에 부여받은 특정한 역할을 얼마만큼 잘 수행해냈는지에 따라 적용되는 것으로, 반재하는 자유주의가 관용과 포용이라는 이름하에 치장한 통치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화면 합성 등의 특수 효과를 위해 이용하는 배경인 크로마 키(chroma key)벽을 영상에서 사용한 것에서 ⟨무대 의상⟩으로 연결된다. 이 작업은 반재하가 박연희와 사전 인터뷰를 하던 도중의 이야기에서 시작된 것으로, 박연희가 연변에서 방송국 PD로 근무하던 시절 회사에서 배포한 근무복은 개량 한복이었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한민족으로 삼고 있었는데 정작 한국에 왔을 때 자신에게 주어진,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진 자신은 한복이 아니라 치파오를 입어야 하는 타자로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아무 배경이 없는 그린 스크린 앞에서 치열하게 연기해야하는 배우들처럼, ‘한민족’으로서, 중국인으로서 수행해야 하는 연기는 조선족에게 부여되는 다중적 역할이다.

⟪러닝룸⟫에서 반재하와 조기현은 작가로서 타자와의 거리를 설정하는 포지션의 위치가 정반대라는 비평을 듣곤 했다. 타자의 삶에 깊숙히 들어가거나, 타자의 이야기를 생생히 가져오는 것이 불러올 수 있는 위험성, 예를 들어 온정적인 시선을 투영하게 되거나 타자를 관용의 대상으로 보게 되는 것에 대한 반감은 반재하가 의도적으로 타자와의 거리를 좁히지 않는 이유이다. 타자와의 일정 거리를 두면서 구조적인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그의 포지션은 이번 작업의 미학적 측면에서도 드러난다. 반면 조기현은 좀더 적극적으로 현실에 다가가거나 재현의 문제를 고민하고, 대상 앞에서 자신의 태도를 성찰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불투명한 막–클로즈업, 간병, 신체⟩의 제작 과정에서 사실 조기현은 직접 간병인을 촬영하고 싶었지만 병원 측에서 이를 불허했는데, 그래서 대안으로 조혜리가 영상을 촬영한 후에 조기현은 영상을 전달 받는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이런 우여곡절은 오히려 조기현이 카메라를 위임하면서 타자의 역량이 강조되는, 진정성을 위임해서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는가라는 고민으로 확장되는 기회가 되었다.

이주・아시아
강영민의 ⟨포도마마는 버드나무 아래서 봄을 기다린다⟩(2019)는 버드나무 가지에 디지털 허수아비를 매달고 그 위에 영상을 프로젝션한 작업이다. 디지털 허수아비는 강영민이 지난 9월 남원에서 열린 전시에서 ⟨숲과 허수아비⟩(2019)로 선보인 이후 두 번째 버전이다. 이번 전시에서 디지털 허수아비는 만주족 신화에 나오는 버드나무 여신 포도마마(Fodomama)에 그의 캐릭터 하트를 합성해서 전지(剪紙) 공예로 제작됐다. 전지 공예는 가위나 조각칼을 이용해 종이에 있는 문양을 오리는 것으로, 동북아시아 북방민족의 오래된 전통으로서 마을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부족민들이 둘러앉아 나무껍질이나 종이를 오리며 화합을 다졌다고 한다. 이 위에 겹쳐지는 영상은 1931년 만주 지역에 세워진 만주국의 국기로 시작해서, 홍콩의 뉴스 매체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South China Morning Post, 南華早報)에서 제작한 중국의 소수 민족 중 하나인 오로첸족(鄂伦春族, Èlúnchūnzú)에 대한 다큐멘터리, 그리고 북한의 인기 가수인 김광숙의 대표곡 ‘푸른 버드나무’로 이어진다. 강영민은 작가 노트에서 “일본제국은 만주국을 건설하며 오로첸족을 '동양의 아리아인'으로 신성화했고,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중국을 침략한 영국의 홍콩 총독부 기관지였다. 아시아 근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두 세력을 종이인형에 투사해 아시아 민중의 '주체의 공백'(the Void of Subject)을 상징해보았다”고 쓰고 있다.

전지 공예는 중국에서 특히 한족(汉族, Hànzú)이 자부하는 전통 풍습 중 하나이지만 안타깝게도 전지의 기원은 중국이 아닌 알타이 문화가 원류라고 한다. 그리고 진지해 보이는 오로첸족의 다큐멘터리 제작사는 영국의 홍콩 식민지 지배 초기 청나라의 정보를 손쉽게 얻기 위해 발행한 영자 신문을 시작으로 설립된 매체이다. 거기에 서정적인 가사의 북한의 인기가요 ‘푸른 버드나무’까지 울려 퍼지는 이 설치는 대림동에서 시작해서 만주와 북한, 아시아의 근현대사를 넘나드는, 무언가를 위한 제단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정체를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다.

대림동과 중국 조선족, 이주・아시아를 주제로 시작한 이번 프로젝트는 김태윤이 기획한 네트워킹 파티 겸 아시아 음악 DJ 파티 ‘대림동엔 양꼬치 먹으러 가는 줄만 알았다’로 시작해서 안대웅이 기획으로 참여한 《러닝룸(Running Room): 간병인, 거리입양, 구제역, 국경, 기시감, 다운사이징, 만주국, 오로첸, 전이, 카메라, 풍경, 흑룡강》 전시, 그리고 《일무소유(一無所有, Nothing to My Name)》를 끝으로 마무리 된다. 999 라이브 바에서 진행된 네트워킹 파티에서는 서울 음악 신의 변방인 대림동에서 벌어진 춤판이 중국판 유튜브로 불리는 콰이쇼우(快手)를 통해 실시간 방송으로 조선족 동포 사회에도 전달되었다. 완벽한 계획에서 달아나기를 시도한 《러닝룸》에서는 《일무소유》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주제를 바라보는 참여자들의 고민과 시선의 교차에 대한 심층적인 논의가 프레젠테이션에서 이어졌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일무소유》는 중국 조선족이자 중국 록의 대부로 불리는 최건(崔健)의 대표곡에서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는 문화 번역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일단 최건은 원어로는 ‘추이젠(Cuī Jiàn)’으로 발음해야 하고, 마찬가지로 일무소유는 ‘이우쒀요우(Yì Wú Suǒ Yǒu)’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중국어 간체로는 ‘一无所有’로 쓰고 중국어 번체이자 한국에서 통용되는 한자로는 ‘一無所有’로 쓴다. 영어 제목은 ‘Nothing to My Name’, 한국어로 풀어 말하면 '내가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네' 정도의 뜻이다. 1989년 중국의 천안문 사태 때 이 노래가 학생과 민중들을 고무시키는 것을 경계한 중국 공산당 정부가 공연을 취소시키자 이에 대한 저항적 메시지의 일환으로 붉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무대에 오른 퍼포먼스는 최건을 아는 사람들에겐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이 노래가 특정한 사회상을 강하게 연상시키면서도 언어와 지역을 달리 하며 갖는 왜곡과 오해, 미끄러짐은 이번 전시의 메타포로 기능한다.

지난 몇 달간 홍콩에서 전해진 거센 민주화의 물결이 한국에 ‘레논 벽(Lennon Wall)’을 불러 놓았다. 반전과 평화의 상징이 된 노래를 통해 사람들은 거대한 폭력을 마주했을 때 존 레논을 떠올린다. 최건과 존 레논은 모두 폭압에 대항했지만 최건의 노래는 보다 큰 상실감을 부른다. 종교, 국가, 전쟁으로부터 사랑과 평화를 이끌어내 구체적인 과제를 제시한 ‘Imagine’에 비해 ‘일무소유’에는 가진 것 없고, 자유 마저 내어주며, 기다림을 부르짖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폭압을 마주하고도 구체적인 대상을 상실한 채 일갈하는 정동은 노래가 갖는 상징성의 이면이다. 아마도 그에게 중국 조선족으로서 중국 사회주의와 다른 민족들과의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일관된 시선을 드러내기 어려운 감각이 자라났던 것은 아닐까. 보편적 인권이 상시적으로 유동하는 접경지대로서 성원권은 직접적인 폭력 못지않게 공존을 위협하는 장이다.

중국 동포, 재중 동포, 재중 한인 등의 표현을 보더라도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동포 혹은 한인이라는 표현은 사회통합을 염두에 두고 한국으로의 귀속성을 강조하거나 차별과 배제를 지양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지만 통합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담론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특정한 상황을 대변하기도 한다. 따라서 중국 조선족이라는 말은 그들이 형성된 역사적 기원과 시대적 맥락에 근거해 현재 분화하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내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대림동에서 조선족 또한 더 이상 이주민과 선주민의 이분법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외국인이 아니라 국민이기도 하고, 때로는 대림동의 더 오래된 정주민이기도 하다. 성원권이 형성된 과정에 차이만 있을 뿐 아무런 차별과 혐오 없이 동등하다면 거짓말이지만, 한 가정 내에서도 중국 조선족 출신과 한국 태생이 섞일만큼 성원권의 경계는 날이 갈수록 양상을 달리한다.

《일무소유》는 현대미술담론에서 낡았다고 얘기되는 것들, 장소특정적이거나 실제 현장과 결부되어 있는 주제, 타자나 진정성, 재현의 문제를 다룬다. 이런 주제는 이른바 주류에서 밀려난, 그러나 현실에서 맞닥트리는 것들이다. 《일무소유》는 대림동과 조선족을 포함한 한국 사회에서의 다문화주의와 동아시아의 초국적 이주 역사, 아시아주의를 가로지르며 과거와 현재, 지역과 아시아라는 스케일을 감각적인 방식으로 확장시키고자 했다.

Haemin Ryu — 2021.5.14 03:24 AM

2019년 11월 12일 - 11월 21일
강영민, 반재하, 오민욱, 조기현

  • 기획 : 류혜민

  • 강연 공동 기획 : 김태윤

  • 그래픽 디자인 : Handi Kim

  • 공간 디자인 : 제로랩

  • 장소 : 문래예술공장 스튜디오 M30 (서울시 영등포구 경인로88길 5-4)

  • 전시 연계 강연

  1. 이진혜(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변호사) : 이혼 후 체류자격 제도 및 판례를 통해 본 이주여성과 차별
  2. 이택광(경희대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교수) : 난민의 존재론
  3. 신현준(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디아스포라는 없다
Haemin Ryu — 2021.5.14 07:48 AM
Haemin Ryu — 2021.5.14 07:57 AM
Imagined Diaspora

Imagined Diaspora

Seoul, Online, Generative Dialogue

Let us share and feel migration and diaspora together

Overview

Imagined Diaspora is a project that was initiated to raise awareness of the challenges faced by migrants, who have become an important part of Korean society—particularly in the context of Seoul’s Daerim-dong neighbourhood, which is home to a large community of Korean-Chinese (Chinese nationals of Korean descent). The number of Korean-Chinese residing in the Republic of Korea is estimated at around 800,000, constituting more than 1% of the entire population.

Artists Youngmean Kang, Jaeha Ban, Minwook Oh and Gihyun Jo have each developed an interpretation of the history and various aspects of transnational migration in East Asia from a present-day perspective. Their interpretations are shared in conversations and through images and essays via Future School Online, opening the project to further questions and dialogue. Dealing with issues of discrimination and the construction of modern history, this project sees diaspora as a key area of engagement in the planning of future societies.

Contemporary discourse on migrants and diaspora is also reviewed through pieces written by Hyunjoon Shin, Alex Taek-Gwang Lee and Jinhye Lee. Hyunjoon Shin touches on the process of migration for those who have taken on various names such as ‘Korean-Chinese’, ‘Goryeo-in’ and ‘Han people’, depending on where they are. The movements of these Koreans over multiple generations are intricately intertwined. Tracking those routes is to atomise the implicit hierarchy and discriminatory status of migrants contained within the term ‘diaspora’. Alex Taek-Gwang Lee follows the existential status of refugees within the wider world order. A nation-state that was created as a means to rule a people considers nationality a precondition for human rights and classifies outsiders as refugees. The growth of capitalism and international cooperation on a global level prioritises the interests of and relationships between nation-states, while the issue of refugees remains unresolved. Lastly, Jinhye Lee discloses the numerous procedures migrants must go through to enter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discriminatory elements of the law. The screening process is painfully difficult and there are various definitions of ‘migrant’, adding to the confusion. Migrating without entering refugee status is experienced as a questionable and arduous undertaking, defying rational explanation.

Exhibition program participants

Happening now

Workers blocking the street during a protest in Vicenza. May 2021

The Venetian Team — The Venetian Team: Lagoon Dialogues — Yesterday

Maestranze dello Spettacolo Veneto during the protest at La Fenice Theatre. June 2021

The Venetian Team — The Venetian Team: Lagoon Dialogues — Yesterday

Demonstration in front of La Fenice Theatre in Venice. June 2021

The Venetian Team — The Venetian Team: Lagoon Dialogues — Yesterday

Venetian workers from art and cultural sector, protesting during lockdown. May 2020

The Venetian Team — The Venetian Team: Lagoon Dialogues — Yesterday

AWI (Art Workers Italia) during the occupation of the Piccolo Teatro in Milan. April 2021

The Venetian Team — The Venetian Team: Lagoon Dialogues — Yesterday

Screenshot from the Dialogues #002 - Lunch at Korean Pavilion

The Venetian Team — The Venetian Team: Lagoon Dialogues — Yesterday

New Project from Officina Marghera and Architetture Precarie

The Venetian Team — The Venetian Team: Lagoon Dialogues — Yesterday

Pandemic and Mechanical Surveillance_Alex Taek-Gwang Lee

Future School Staff — Futurology of Schools — Yester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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